2026. 5. 26. 22:51ㆍ인스퍼레이션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패닉 괴물이 나타나면 부랴부랴 움직이기는 했으니까. 보고서 마감 전날 밤, 반기 평가 전 주말, 팀 전체 발표 이틀 전 —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해서 나를 의자에 앉혔다. 20년 넘게 미루기의 달인처럼 살았는데도 마감을 대놓고 넘긴 적은 없다. 이걸 자랑하는 건지, 변명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Tim Urban이 TED 강연에서 한 말이 있다. 미루기가 심한 사람의 뇌에는 합리적 의사결정자 말고 순간적 만족감 원숭이가 같이 산다고. 원숭이가 운전대를 잡으면 유튜브, 뉴스,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 — 소위 암흑의 놀이터로 끌려간다. 죄책감과 공포가 뒤섞인 그 이상한 공간. 생산적이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데 멈추질 못하는 그곳. 나는 이 묘사에서 멈칫했다. 너무 정확해서.
패닉 괴물은 직장인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원숭이를 제어하는 건 패닉 괴물뿐이라고 Urban은 말한다. 마감이 다가오거나, 망신을 당할 것 같거나,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을 때만 나타나서 원숭이를 나무 위로 쫓아버린다. 그제야 합리적 의사결정자가 운전대를 돌려받는다.
중간관리자 생활이 20년쯤 되면 이 패턴을 몸이 먼저 안다. 마감 3일 전까지는 손도 안 대다가, 이틀 전 오후부터 뭔가 이상한 집중력이 생기고, 자정을 넘기면서 작업 속도가 올라간다. 커피 두 잔, 에너지드링크 하나, 그리고 어떻게든 제출. 오상무도 이렇게 하고, 김대리도 이렇게 하고, 나도 이렇게 한다. 회사라는 시스템이 패닉 괴물의 출몰 시점을 인위적으로 조율해주는 거다. 분기마다, 반기마다, 연간마다. 구조가 우리를 겨우 살려두는 셈이다.
문제는 이게 '다행'인 척하다가 습관이 된다는 거다. 패닉 괴물에 의존하는 횟수가 쌓일수록 몸과 의욕이 조금씩 닳는다. 긴장이 기본값이 되고, 회복할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괴물이 등장해도 예전처럼 튀어오르질 않는다. 반응이 느려진다. 둔해진다.
마감이 없는 일들은 어떻게 되나
1인 기업을 준비하겠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던가. 2년? 3년? 브런치 계정을 만들고 글 하나 썼다. 그게 끝이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건 매 분기 초 결심이다. 작년 러닝화는 아직 새것이다. 은퇴 후 강의를 해보겠다는 생각 — 콘텐츠를 뭘로 할지, 어떤 플랫폼을 쓸지, 수익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다가, 그냥 계산만 하고 끝난다.
이것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마감이 없다. 아무도 언제까지 하라고 하지 않는다. 1인 기업 준비 기한을 정해놓고 못 지키면 KPI에 반영하는 사람이 없다. 달리기 시합에 등록하지 않으면 출발선에 설 이유가 없다. 강의 개설일을 잡아놓지 않으면 콘텐츠를 만들 이유가 없다.
이게 바로 미루기가 가장 무서운 구간이다. 마감이 없으니 패닉 괴물이 깨어날 이유가 없다. 원숭이는 계속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암흑의 놀이터에서 죄책감과 함께 스크롤을 내린다.
인생 달력의 빈 상자들
Urban은 강연 말미에 인생 달력을 꺼낸다. 90년 곱하기 52주, 상자 4,680개. 이미 많이 썼다고. 그 상자들을 눈으로 보고 나면 '언젠가'라는 단어가 갑자기 불편해진다.
나는 지금 상자를 대략 2,200개쯤 쓴 것 같다. 반도 더 지났다. 남은 절반에서 패닉 괴물이 없는 일들을 시작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것마저 마감 없이 미루다가 끝낼지 — 아직 모른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더 무서운 건 따로 있다. 패닉 괴물조차 나중에는 반응을 안 하게 되는 것. 40대에 자정을 넘겨 보고서를 쓰던 집중력이, 50대에도 같을까. 몸이 안 된다. 뇌가 안 된다. 아니면 그냥 의욕이 없다. 패닉 괴물이 깨우려고 해도 원숭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서 어쩌라고"를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게 좀 무섭다. 그 가능성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는 게.
최악은 이거다. 패닉 괴물도 안 통하고, 원숭이와 함께 나무 위로 도망쳐버리는 것. 직장에서 간신히 버티되 품질은 조금씩 낮아지고, 마감을 아슬아슬하게 겨우 맞추다가 가끔 넘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기 삶의 일들은 — 원래부터 기대를 안 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1인 기업도 없고, 건강도 방치하고, 강의도 생각만 했고. 그 상태로 65세를 맞이하는 것. 이런 결말에는 이름이 있다. 그냥 미루기다. 평생짜리.
Urban은 강연 마지막에 청중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지금 당신 삶에서 무엇을 미루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언젠가 곧' 시작하겠다는 그 계획이 정말 그렇게 될 것인지를. 나는 그 대목에서 웃었다. 그리고 웃은 다음에 조금 불편해졌다. 내 답이 너무 뻔했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패닉 괴물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감이 없어도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의자에 앉는. 합리적 의사결정자가 원숭이를 이기는 뇌.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 말도 동시에 맞다.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숭이와 함께 나무 위로 올라가지는 말아야 한다. 직장 마감이든, 인생 마감이든, 패닉 괴물이 오면 최소한 의자에는 앉아야 한다.
그 다음은 — 모르겠다. 진짜로. 근데 이 글을 여기까지 쓴 것만큼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게 의자에 앉은 거다. 미루기를 고백하는 글을 쓰면서, 일단 앉았다는 거. 그게 시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원숭이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고 영상

🔗 원본 영상 보기
'인스퍼레이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에게 "완료했습니다"를 금지시킨 날 (0) | 2026.06.12 |
|---|---|
| 루프 설계? 결국 사람의 일을 줄인다. (1) | 2026.06.12 |
| 나는 틀린 적이 없다? 문제는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다. (0) | 2026.05.24 |
| 고지식한 팀장이 됐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모습의 (0) | 2026.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