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틀린 적이 없다? 문제는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다.

2026. 5. 24. 15:32인스퍼레이션

나는 틀린 적이 없다. 문제는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다.

어제 또 뉴스 댓글창을 봤다. 안 보려고 했는데 봤다. 볼 때마다 결심한다 — 다시는 안 본다. 근데 또 본다. 그게 뭔지는 안다. 내가 옳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거다. 같은 쪽 댓글들이 쭉 올라오면 안도감이 온다. "그렇지, 역시 나만 이상한 게 아니야." 잠깐이지만 안심이 된다.

직장도 비슷하다. 회의에서 내가 말한 방향이 묻혔다. 다른 사람 말이 채택됐다. 나는 또 생각한다 — 아, 이 조직이 문제야. 저 사람이 문제야. 내가 틀렸다는 생각은 잘 안 든다. 정확히는, 거의 안 든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

요즘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도 한다.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더 공격적이고,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근데 솔직히 따져보면 — 예전이 언제지? 내가 기억하는 예전이 얼마나 정확하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하버드의 답

하버드에서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신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냐"고. 그리고 뇌 영상을 찍었다. 결과가 좀 불편하다. 사람들이 신의 생각을 상상할 때 활성화된 뇌 영역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할 때와 거의 동일한 영역이었다. 신을 상상했는데 자기 자신이 나왔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은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 형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거다.

커트 그레이라는 심리학자가 이걸 연구했다.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다. 핵심은 이거다.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행동은 다 이유가 있고, 상대가 하는 행동은 그냥 나쁜 게 된다.

피해자 프레임이 씌워지는 순간, 명백한 가해 행위에도 면제부가 적용된다. 내가 먼저 상처받았으니까. 나는 그냥 반응한 거니까. 이게 선한 확신의 작동 방식이다. 자기 확신이 선의로 포장될수록, 상대의 행동은 더 쉽게 악의로 읽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정한다. 회의에서 내 의견이 묻혔을 때, 나는 내가 왜 그 의견을 냈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상대방이 왜 다른 말을 했는지는 별로 안 궁금해한다. 그게 나다. 그게 우리다.


세상이 나빠진 게 아니라 내 센서가 달라진 거다

커트 그레이가 책에서 정리한 데이터가 있다. 수십 년치 협력 실험, 봉사 참여율, 기부 지수. 전부 우상향이다. 세상이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아졌다. 근데 우리는 왜 매번 "지금이 말세"라고 느끼는가.

50년대 사람들도 그랬다. 70년대도 그랬다. 2000년대도 그랬다. 매 시대 사람들이 "요즘 세상은 너무 각박하다"고 했다. 다들 예전이 더 좋았다고 했다. 이게 패턴이라면, 이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식의 문제다.

연구자들이 설명하는 건 이거다. 사회가 안전해질수록, 우리의 위험 감지 센서가 더 예민해진다. 생존이 위협받던 시대엔 진짜 큰 위험에만 반응했다. 그게 사라지자, 이제 작은 것들이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댓글 하나가 위협이 되고, 회의에서 묻힌 한 마디가 인격 모독이 된다.

이걸 내게 대입해보면 좀 서늘하다. 내가 요즘 더 예민해진 게, 세상이 더 나빠져서가 아니라 내 기준이 높아진 거라면? 그리고 그건 사실 나쁜 일이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참지 않겠다는 신호라면?


선한 사람들이 부딪히면 불꽃이 튄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실험을 했다. 진보와 보수에게 물었다. "가장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누구냐." 답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점수 차이가 극단적이었다. 같은 '약자'를 두고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게 뭘 의미하냐. 진보도 보수도, 각자의 방식으로 약자를 지키려 한다고 믿는다. 둘 다 선하다고 자기를 정의한다. 근데 그 선함이 부딪히면 전쟁이 된다. 악이 선과 싸우는 게 아니다. 선이 선과 싸우는 거다. 그리고 그게 훨씬 더 풀기 어렵다. 왜냐면 둘 다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니까.

직장 갈등도 마찬가지다. 나는 팀 전체를 위해서 그 말을 했다. 상대방도 팀 전체를 위해서 다른 말을 했다. 우리 둘 다 선한 의도였다. 그래서 더 상처가 된다. 나쁜 의도였으면 차라리 무시라도 할 텐데, 저 사람도 자기가 옳다는 선한 확신이 있으니까 타협이 안 된다.

세상이 각박해진 게 아니다. 세상은 똑같이 돌아간다. 나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이를 받아들이는 민감도가 높아진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그 민감도가 높아졌다는 건 진보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찰의 증거이기도 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으니까.


"더 말해줄 수 있어?" — 다섯 글자

데릴 데이비스라는 흑인 블루스 뮤지션이 있다. KKK 단원들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9년 동안. 그리고 수년 뒤, KKK 지도자가 스스로 지부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그 지도자는 나중에 데릴에게 KKK 로브를 선물로 줬다. 그리고 딸의 대부로 삼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 데릴이 한 건 하나다. 들은 거다. 판단하지 않고, 반박하려 달려들지 않고, 그냥 들었다. "더 말해줄 수 있어?" 이 한 마디를 반복한 거다.

하버드 실험에서 질문을 많이 한 쪽이 상대에게 훨씬 더 높은 호감을 받았다. 경험을 이야기한 쪽이 더 합리적이고 존중받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팩트를 던진 쪽이 아니라. 내 경험을 말하고, 상대의 경험을 물은 쪽이.

나는 이게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면 어렵다. 상대가 틀린 말을 하고 있을 때, "더 말해줄 수 있어?"를 하려면 일단 내 입을 막아야 한다. 내가 가진 팩트 칼을 잠깐 내려놓아야 한다. 그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나는 그 칼을 들고 있을 때가 더 안전한 느낌이 든다.


결국 나도 그 사람이다

요즘 대화가 사라지고 있다. 댓글창에는 설득이 없다. 주장만 있다. 회의실에도 설득이 없다. 리포트만 있다. 다들 자기 팩트를 들고 와서 던지고, 상대방이 설득되길 기다린다. 안 되면 저 사람이 문제인 거다.

근데 나는 그 방식으로 아무것도 바꾼 적이 없다. 팩트로 이긴 것 같았는데, 관계는 지고 있었다. 내가 옳았는데,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다. 그 쓸쓸함이 좀 오래간다.

"더 말해줄 수 있어?"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게 상대를 위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나를 위한 질문이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하는 질문이다. 내 센서가 높아진 것처럼, 상대의 센서도 높아져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질문이다.

세상은 나빠지지 않았다. 나도 틀리지 않았다. 상대방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팩트가 아니라 경험을.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결국 그것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뉴스 댓글창을 열 것이다. 아마도. 근데 이번엔 적어도 그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옳다고 믿는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다.


참고 영상

  •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망치는 이유  YouTube

  • 참고 도서: 커트 그레이,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